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인민공화국 (문단 편집) == 영토 == 새로운 폴란드를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은 바로 영토 문제였다. 원래 전쟁 당시 폴란드 망명 정부는 전후 동프로이센, 상부 슐레지엔, 그리고 포메른 지방의 일부 국경 지대를 할양받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는 전후 소련이 폴란드 침공 당시 점령했던 영토를 폴란드에 돌려준다는 가정 하의 얘기였고 스탈린은 당연히 [[폴란드 침공]] 과정에서 차지한 영토를 다시 내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대신 독일의 [[동프로이센]] 남부 지방과 [[실레시아|슐레지엔]], [[포메른]] 동부 지역의 대부분,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의 일부가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 전후 폴란드의 영토변화▼[br]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커즌 라인(폴란드어).svg|width=100%]]}}} || ||{{{#ffaaaa {{{+2 ■}}}}}} 새로 얻은 이전 [[나치 독일]]의 영토. [br] {{{#cccccc {{{+2 ■}}}}}} 소련에게 빼앗긴 영토. [br] {{{#00ff00 {{{+2 ■}}}}}} 연두색으로 변경된 [[국경선]]은 [[오데르-나이세 선]]. [br] {{{#0f48ce {{{+2 ■}}}}}} 파란색으로 변경된 [[국경선]]은 [[커즌 선]]. || 이 결과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 중 빌노(Wilno, 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폴란드가 전간기인 1920년 [[빌뉴스 위기]]를 통해 합병했다. 폴란드 침공이 완료된 직후 리투아니아로 반환되었다가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병합하면서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르부프(Lwów, 현 우크라이나 [[르비우]]), 브제시치(Brześć, 현 벨라루스 [[브레스트(벨라루스)|브레스트]]) 등 약 17만 8천 ㎢를 소련에 잃었으나 독일로부터 약 10만 1천 ㎢의 영토를 할양받아 영토 손실을 어느정도 벌충했다. 하지만 소련에게 빼앗긴 영토가 너무 컸으므로 전후 폴란드의 면적은 전쟁 전에 비해 오히려 7만 7천 ㎢가 줄었다. 기본적으로 폴란드가 소련에 잃은 땅의 대부분(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은 상당수의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인구를 포함하는 소수민족 다수 지역인데다 척박하고 개발도 거의 안 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독일로부터 얻어낸 지역은 원래 살던 [[독일인]]은 소련군이 모두 쫓아내어 비웠으므로 더 이상의 분쟁의 여지 없이 폴란드인만으로 채울 수 있었고, 우크라이나의 [[갈리치아]] 지역이나 벨라루스 서부 지역 등과 비교해서 [[그단스크]](단치히), [[브로츠와프]](브레슬라우)와 같은 도시를 포함하여 공업이 상당히 발달한 지역이었던데다가 전쟁 전 독일 식량 생산량의 1/4을 담당하던 [[곡창지대]]였다.[* 그러나 2차 대전 직후 이 지역의 경제는 독일인 인구가 거의 다 추방된 영향 & 갈리치아 등에서 재산도 못 챙기고 피난 온 폴란드인 난민들이 새로 정착하느라 이것저것 혼란스러웠던 영향으로 전후 초반기 동안 생산력이 독일령 시절의 절반도 못 미치기도 했다.] 게다가 굉장히 좁은 해안선을 가진 전간기 영토와 달리 새로이 확정된 영토는 훨씬 넓은 해안선을 보장하여 사실상의 내륙국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냉정하게 보면 전후 국토 면적이 줄어든 거랑 르부프나 빌노를 상실한 것 정도를 제외하면 폴란드라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득이라고 볼 수 있는 교환이었다. 강철의 대원수의 지시에 강제로 따라야해서 문제였지. 특히 르부프의 경우 폴란드 인민공화국 정부는 두고두고 아쉬워했지만, 결국 소련의 결정을 따랐다.[* 극우 성향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소련이 빼앗아서 다른 공화국에 편입시킨 편입한 리투아니아 빌뉴스, 우크라이나 서부, 벨라루스 서부 흑루테니아 지역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물론 서쪽의 새 영토를 독일에게 돌려주자고 하진 않는다--] 물론 공산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이었던지라 소련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영토 변화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지역은 폴란드 입장에서 비교하자면 영국의 [[북아일랜드]] 비슷하게 특별한 산업 기반은 없는 대신에 민족문제로 인한 분란만 심각한 이를테면 계륵같은 지역이었다. 물론 갈리치아 일대에는 농촌과 도시 전반에 상당한 수의 폴란드인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은 대개 근세 갈리치아가 [[크림 칸국]]의 침략으로 초토화된 직후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정착한 폴란드인 농민들의 후손 혹은 폴란드화한 우크라이나인들의 후손으로 지배민족-피지배민족 개념과도 관계가 먼 사람들이 많았다.[* 단 폴란드 2공화국 말에 폴란드 민족주의를 내세워 이 지역을 차지하고 타 동슬라브계 민족이나 유대인에게 동화정책을 펼치거나 차별하는 일은 있었다.] 그럼에도 르부프 등 대도시를 제외하면 갈리치아 지역 일대에는 우크라이나인 인구가 더 많았고,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오헝제국에서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은근슬쩍 키워주었던 배경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이 폴란드 민족주의 세력을 서서히 압도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배경 하에서 [[스테판 반데라]]이 이끄는 OUN의 폴란드인 학살과 추방 등등 복잡한 현대사를 거치며 결국 우크라이나 민족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갈리치아 지역이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넘어간 책임을 물으려면 소련 외에도 [[스테판 반데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에도 물어야 한다. * 빌뉴스의 경우 [[야기에우워 왕조|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였지 폴란드 왕국의 영토였던 적이 없었다. 폴란드 제2공화국의 빌뉴스 합병은 폴란드 제2공화국이 과거 제1공화국 연방을 계승했다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폴리투 연방 재건주의자]]들이나 범민족주의를 내세운 로만 드모프스키(Roman Dmowski, 18641939)에 의해 일어난 일인데, 리투아니아인 민족주의자들이 여기 동의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 벨라루스 서부 지역 역시 전통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중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지 폴란드 왕국의 영토는 아니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해당 지역의 엘리트층은 폴란드인(정확하게 말하면 폴란드화한 [[리투아니아인]]과 벨라루스인들), 도회지 인구는 유대인, 농촌 인구는 정교회를 믿는 벨라루스인 인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러시아 제국이 지배하는 기간동안 벨라루스 서부 지역의 폴란드인 인구 상당수가 [[폴란드계 미국인|러시아 제국의 가톨릭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폴란드인 인구가 격감한 상황이었다. * 반면 새로 얻은 지역 중 [[슈체친]]을 비롯한 상당수 지역은 중세 [[튜튼 기사단]]이 정착한 이래 전통적으로 [[프로이센]]의 전신 [[독일 기사단국]]의 영토로서 주민 상당수가 독일인 혹은 독일화된 슬라브인들과 발트 민족들이었다. 독일 기사단국이 수백년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의 봉신국이이기는 했으나 폴란드 역시 이 지역에 대해 민족자결주의를 기반으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수백 년에서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론 이렇게 폴란드 동부를 소련(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가져가는 대신, 독일 동부를 폴란드에 떼어준 것은 폴란드 침공 당시 빼앗은 폴란드 영토를 확정하기 위한 스탈린의 생색내기였으나, 그 빼앗은 영토(서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전후하여 폴란드가 전간기 러시아 내전 당시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벨라루스 인민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이전에 멸망한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대놓고 폴란드와 전쟁을 벌였다.]의 영토를 전쟁을 돕는 댓가로 일부 획득하거나 혼란스러을 정국을 타서 차지한 영토로서 민족 구성이 매우 복잡한 지역[* 해당 지역들은 홀로코스트 이전까지는 도회지 주민 대다수가 유대인이었으며, 농촌 주민 상당수는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이나 벨라루스어를 사용하는 벨라루스인들로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폴란드인들과 정체성이 서로 달랐다.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종교도 벨라루스인들은 주로 벨라루스 [[정교회]], 우크라이나인들은 주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나 [[우크라이나 정교회]], 폴란드인들은 [[로마 가톨릭]] 등으로 나뉘었기 때문이었다.]이었다. 원래 소련이 폴란드를 침략해 우크라이나로 합병한 지역은 1차 대전 직후에 영국의 [[존 커즌]] 외무장관이 전후 폴란드-우크라이나 경계로 삼은 [[커즌 선]]과 거의 일치한다. (위의 그림에서 커즌 선과 2차 대전 이후 확정된 국경선 참조.) 영국을 비롯한 1차 대전 연합국, 즉 서방측은 폴란드에 호의적이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적대적이었지만, 그들도 이곳을 폴란드령이라기보다는 우크라이나령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루마니아 역시 헝가리로부터 상당한 양의 영토를 얻어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폴란드가 동부를 잃고 대신 서부를 얻고 그 서부에 살던 독일계는 거의 다 쫓아내면서, 전체적으로 서쪽으로 이동한 국경선 덕분에 민족과 국가의 영역은 예전보다 잘 일치하게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폴란드는 역사상 최초로 단일 민족 국가가 되었다. 스탈린에게 빼앗긴 영토는 사실 벨라루스인-우크라이나인이 다수인 지역이었고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ationalities_in_Second_Polish_Republic_ca._1931.png|#]], 대신 독일로부터 뜯어낸 서부의 영토는 독일인이 다수인 지역이었지만, 나치의 대규모 유대인 학살과 전후 독일인 추방, 소련과의 폴란드인-우크라이나인 인구 교환 등 강제적인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 결과, 폴란드는 단일민족국가가 된 것이다. 이렇게 새로 바뀐 영토로 인해 추후에 불거진 논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문서를 참고. 이때 원래 커즌 선 서쪽에 있던 [[비아위스토크]] 지역만은 폴란드에 돌려주었다. 그러나 [[커즌 선]] 서부에 위치한 르부프(르비우)는 전통적으로 폴란드계 주민이 다수를 차지했던 도시였으며 폴란드에 있어서도 의미깊은 역사 도시였으나 이를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집어삼켰다. 다만 르부프를 비롯한 동부 갈리치아 지역은 폴란드계 주민 못지않게 우크라이나계 주민도 많이 살았으므로, 만약 르부프가 폴란드의 영토로 남았다면 현실의 르비우와는 정반대로 우크라이나 쪽에서 르부프를 자신들이 수복해야 할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